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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 김한우 (영화 일기)

5월 10일. 박하사탕(2)/기차소리와 인셉션

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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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에 이어서. 200011일에 개봉을 한 <박하사탕>2000년을 집어삼켰다. 설경구는 이 영화로 최고 스타가 되었고, 이창동 감독은 씨네21이 선정한 올해의 감독, <박하사탕>은 씨네21이 선정한 올해의 영화가 되었다. 올해의 영화 선정 이유 글은 박평식 평론가의 멘트로 시작된다. “내게 최고라는 느낌을 준 영화는 <박하사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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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호(설경구)가 거쳐 갔던 시간들. 대놓고 정치적이다. 1999년 봄 야유회’. 사흘 전, 1999년 봄 사진기’. 1994년 여름 삶은 아름답다’. 1987 고백’. 1984년 가을 기도’. 19805면회’. 1979년 가을 소풍’. 이 일곱 개의 역 중 최소 세 곳의 역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의미 있는 순간들이다. 1987년과 19805, 영호는 힘들어했고, 1979년 가을이 영호가 돌아가고 싶었던 순간이었다. 1980년만은 5월로 표기했던 것처럼 1979년 역시 10월로 표기했다면 어땠을까. 그럼 완전 힙합이었을 텐데 말이다. 이렇게 한 남자의 이야기로 시작했던 이야기가 대놓고 정치적인 순간을 거쳐 가는 것은 어찌 보면 유치한 전개일수도 있다. 그러나 <박하사탕>은 유치하지 않고 왠지 진정성이 느껴졌다. 이것은 이창동에 대한 프리미엄이라기보다는, 이 당시 90년대 2000년대 한국영화에 대한 프리미엄이라는 개인적인 취향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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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평 중에 이런 평도 있었다. ‘광주가 나옴으로써 이 영화는 광주를 벗어날 수 없게 됐다. 이 영화는 광주에 관한 영화다.’ 그 당시에 영화를 봤다면 나 역시 이런 생각을 했었을 것 같다. 이해가 간다. 그 당시에는 그만큼 광주에 대한 영화가 없었다. 그니까 2018년에 처음으로 6월 항쟁을 다룬 <1987>이 나왔기에 <1987>이 조금 더 고평가를 받았던 것처럼, <박하사탕>은 광주를 제대로 다룬 영화로 얘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광주는 이제, 제대로 다뤄졌는가. <택시운전사>는 절대 아니다. <화려한 휴가>? 부끄럽다. 생각해보면 <택시운전사>는 천만 영화로 기획되서는 안 됐었다. 아쉽고 아쉽다. 광주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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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하사탕>을 제작할 당시, 제작진의 가장 큰 고민은 이 영화를 영화 순으로 찍느냐, 시간 순으로 찍느냐였다고 한다. 대세는 시간 순. 특히 연기자 설경구가 이를 원했다고 한다. 그래야 감정 몰입이 더 쉬우니까. 영화 순대로 찍으면 설경구는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나 다시 돌아갈래!’를 외치며 죽겠다고 난리를 쳤어야 하니까. 하지만 감독은 영화 순을 원했다. 첫 번째 이유는 자기가 누군지 모르고 시작하는 것이 잃어버린 자아를 찾는다는 영화의 내적 방향과 일치한다는 것이었다. 그니까 현재의 영호는 너무 많이 변해버려서, ’과거의 영호를 잃어버린 것, 즉 자기가 누군지 모르는 것이다. 순수했던 과거의 나 자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관객들과 함께 과거를 거슬러 가는 내적 방향이 일치한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듯하다. 두 번째 이유는 이렇다. ’뒤로 갈수록 점점 감정이 세지는 것을 원하기 때문.’ 내가 본 <박하사탕>은 시간 역순이 아니다. 내가 본 <박하사탕>1999년 봄 야유회 당일에 끝나는 영화다. 정확히 영호가 기차에 치이는 순간, 그 순간을 1초라고 가정한다면, 1초 동안 무한히 늘어난 영호의 머릿속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1초 동안 영호는 과거 여행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도착한 1979년 같은 장소에서 영호는 기차 소리를 듣고 깨닫는다. <인셉션> 용어로 표현하자면 이 기차 소리는 을 알리는 신호와 같다. Edith PiafNon, Je ne regrette rien. ‘난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그러나 노래 제목과 달리 영호는 후회하고 있다. 과거로 가면 갈수록 더 후회가 커지고 있다. 감정이 격해지고 있다. 과거를 역순으로 돌아가고 있기에 영호는 이 때 멈췄어야했는데.’가 아니라 이 때가 더 좋았네.’를 느낀다. 그리고 가장 좋았던 순간에 영호는 이게 꿈임을 깨닫고, 절대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영화가 끝이 난다. 완벽히 닫힌 결말. 이 영화는 이야기의 다음이 없다. 즉 미래가 없다. ‘기적 중 기적정도가 일어나야 영호는 살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반복하자면 이 영화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끝이 나는 영화이다. 일말의 희망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역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과거 돌아볼 생각하지마. 미련 버려. 절대 못 돌아갈 거야. 알겠지. 알겠으면 이제 미래를 봐. 넌 안 죽을 거잖아. 영호처럼 허튼짓 안할 거잖아. 그럼 이제부터 살아가는 거다? 그래. 제대로, 살아보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