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4일. 그랜 토리노/클린트 이스트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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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그랜 토리노>(Gran Torino, 2008) 관람.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연기 은퇴작이라는 썰이 있던 작품이다. 뭔가 다니엘 데이 루이스랑은 달리 이스트우드 형은 은퇴하신다해도 말릴 수가 없을 것 같다. 무려 1930년생 분이시다. 쉬신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대신 감독으로써 오래 오래 좋은 영화 만들어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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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얘기하다보니 오래 살아계셨으면 좋겠을 영화인들이 떠오른다. 모건 프리먼 1937년생, 마이클 케인 1933년생, 하비 케이틀 1939년생, 리들리 스콧 1937년생. 그에 비하면 스티븐 스필버그는 애기다. 1946년생. 30년대생 분들은 전부 80대인 건데, 진짜 현실적으로, 혹은 과학적으로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이 드니 슬프다. 진짜 모건 프리먼, 마이클 케인 두 분은 돌아가시면 정말로 슬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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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 토리노>는 그 슬픔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는 영화이다. (**여기서부터 <그랜 토리노>의 스포가 있음**) 영화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죽는다. 죽으며 ‘그랜 토리노’라는 유산을 남긴다. 죽는 것은 필연이다. 인간은 모두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면, 남은 것은 이제 어떻게 죽을까, 이다. 참 웃기다. 평생 어떻게 살까, 를 고민하다 어느 순간 갑자기 어떻게 죽을까를 고민한다. 고민이 바뀌게 되는 것은 어느 시점일까. 보통 사람들은 그 모멘트를 딱 분명하게 어느 순간이라고 말할 수 없겠지만, 영화감독은 그게 가능하다. 어떤 작품을 그 전환점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할아버지의 모든 영화를 보지 못해, 아직 이 감독의 그 순간을 확실히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확실한건 <그랜 토리노>는 아니다. 지난번에 본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이미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근데 그게 이미 1993년이니, 이 감독 정말 대단한 감독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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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함과 별개로, <그랜 토리노>는 왠지 영화에서 낡은 느낌이 난다. 영화 속 고집쟁이 할아버지처럼 뭔가 투박하고 자신만의 고집이 느껴지는 영화이다. 특히 씬과 씬의 연결이 매우 거칠고, 어떤 장면은 고민 없이 쉬운 선택을 내린 것 같이 보인다. 영화의 이야기와 메시지 자체도 그다지 신선하진 않다. 마지막 장면에서 월트 코왈스키가 총을 꺼내지 않고 죽음을 맞이한 것, 그럼으로써 적을 처치하고 자신 주위의 작은 세계를 구원해낸 것, 이 설정은 기발하긴 하나 또 따지고 보면 엄청나게 기발한 것도 아니긴 하다. 영화가 다소 구세대와 신세대 간의 우정으로 흘러간 점, 그리고 영화의 배경 규모가 상당히 좁다는 점 등이 영화를 조금 덜 비장하게 만든 것 같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 영화는 다른 영화들에 비교해서 평균 이상의 영화인 것은 분명하다. 삐까뻔쩍한 72년산 그랜 토리노처럼, 수천 번 수만 번 조이고 닦고 기름칠한 작품인 것이다. 그랜 토리노, 잘만 굴러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