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 김한우 (영화 일기)

5월 3일. 아무르(2)/평론가 신형철 "죽일 만큼 사랑해"

김한우 2018. 5. 3. 23:16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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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의 신형철 평론가가, 무려 문학평론가가 남긴 <아무르> 리뷰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안 그래도 너무 좋았던 영화가 더 좋아졌다. 그의 글은 전문이 한 구석도 빠짐없이 다 좋았지만, 가장 좋은 한 마디의 표현은 이거였다. ‘죽일 만큼 사랑해.’ 이 쉽고도 기발해 미칠 것 같은 문장. 한 줄 평으로 밥 벌어먹고 사는 이동진 평론가는 한 줄 평을 연구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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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영화는 질문 거리가 별로 고민하지 않아도 마구 떠오르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당연히 그런 영화였다. 어제는 오래 생각하지 못해 그 질문들의 답을 못 얻었지만, 오늘은 그 머릿속에 있던 질문들을 조금씩 풀어보려고 한다. 1. 비둘기의 의미는 무엇인가. 안타깝게도 신형철 평론가가 이에 대해 자세히 써놓는 바람에, 나만의 대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조르주가 처음에는 비둘기를 쫓아 보냈고, 두 번째에는 비둘기를 포획한 것이 아니라 포옹했다고 적었다. 이 역시 너무 멋진 표현이었다. 거기에 내 표현을 살짝 얹겠다. ‘비둘기를 포옹한 조르주 옹()’. 아 비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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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화의 문을 여는 오프닝. 이것은 어떤 표현이 아니다. 영화는 진짜 말 그대로 문을 열며 시작한다. 대략 여덟 명의 건장한 사내들이 노 부부의 집 문을 연다. 뭔가 특수한 장치까지 방금 막 사용했다. 내가 오프닝을 다시 보고 의아했던 것은, 왜 고작 이 문 하나 여는데 이렇게 많은 인력과 장비가 투입됐냐는 거다. 기억을 되짚어보면, 이 문은 분명 그리 숙달되지 않은, 아무 집이나 터는 도둑이, 스크루드라이버 따위로 쉽게 넘볼 수 있었던 문이었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 조르주는 분명 나가며 밖에서 문을 잠갔다. 달리 특별한 장치를 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세 번째 궁금증은 도대체 조르주는 어디로 사라졌냐는 거다. 이 늙은이는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그래서 내 답은 이거다. 조르주는 애초에 나가지 않았다! 이 문 하나에 소방공무원 여럿과 고급 장비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분명 문에 특수 잠금장치가 추가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누구도 아닌 조르주가 했을 것이며, 그리고 난 뒤 조르주 또한 집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 것 같다. 그렇다면 오프닝 씬에 찾아온 사람들이 조르주를 발견했어야하는 것 아니냐, 하는 반문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 대한 내 대답은 아직 찾지 못했다이다. 이 영화를 본 우리는 이 집의 구조를 아주 잘 알게 된다. (이 말은 김혜리 기자의 말이기도 하다.) 문을 열면 왼쪽엔 안느가 누워있는 침실이 있고, 오른쪽에는 부엌이 있다. 오프닝 씬을 자세히 보면, 카메라는 한 번도 오른쪽을 비추지 않는다. 그리고 또 떠올려야하는 사실은, 조르주가 안느의 환영이 설거지하는 물소리를 듣는 순간 누워 있었던 방은, 바로 집 오른쪽에 있는 방이라는 사실이다. 조르주는 그 순간 숨을 거둔 것이다. 나는 아마 조르주도 그 방에서 시체가 되어 안느처럼 누워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까지가 아마 조르주의 아무르(love)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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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감상평에, 이 영화는 다 좋은데 엔딩이 아쉽다고 썼었다. 이자벨 위페르 출연료 뽕 빼려고 한 거 아니냐는 악담까지 날렸었다. 신형철 평론가는 이 역시 멋들어지게 표현하시는데 성공했다. (감동적인 것은 신 선생님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조르주가 안느의 환영과 함께 나가며 영화가 끝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썼다.) 부모가 앉던 자리에 앉은 딸. 이제 죽음은 그녀에게 올 것이라는 거다. 신 선생님의 글을 여기에 모시며(a.k.a. 복붙) 오늘 이 자리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부모의 의자를 그녀가 물려받았다. 이제는 그녀에게 죽음이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