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6일. 만춘(늦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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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만춘>(a.k.a. 늦봄)을 봤다. 아시아영화 100 리스트 공동 15위에 오른 영화. 그 리스트의 1위는 오즈의 <동경 이야기>인데 난 <만춘>이 뭔가 더 좋았다. ‘더’ 좋다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동경 이야기>도 정말 좋았다. <만춘>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오즈 영화’의 출발점에 해당하는 영화라고 한다. 하라 세스코 배우가 오즈 영화의 첫 주연을 맡은 영화이기도 하다. 아직 못 본 이 감독의 영화가 많아 뭐부터 봐야 할지 정하기 어려웠었는데, <만춘>을 먼저 보길 잘했다. 이 영화 이후의 영화부터 먼저 봐야겠다. 그 후 영화들이 네이버 영화 서비스에도 많아서 다행이다. 내 네이버 페이는 모두 여기에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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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족에 대한 애정이 많지 않다. 그럼에도 이런 가족 영화는 좋았다. <만춘>은 가족이 서로를 너무 아끼기 때문에 생기는 갈등을 그린다.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생긴 갈등은 결국 언젠간 풀리기 마련이다. 서로 정말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오해를 풀 수 있는 기회가 반드시 생길 것이다. 하늘을 믿지 않는 나도, 이것만큼은 하늘이 도와줄 것 같다. 그런 마음 때문에 이 영화가 특히 좋았던 것 같다. 이제 영화에 대한 이야기. <만춘>. 晩春. 늦은 봄. 봄은 대체로 ‘좋은 날’을 의미하는데, 이 영화에서는 ‘딸 노리코의 결혼’이 봄으로 그려진다. 노리코는 혼자인 아버지가 걱정되어 시집 갈 생각을 하지 않는데, 이를 걱정한 아버지는 자신도 재혼을 할 거라며 노리코를 속인다. 착한 거짓말. 나는 이 거짓말을 하는 아버지의 표정을 자세히 보았다. 오즈의 영화는 사람의 표정을 정말로 제대로 관찰할 수 있는 영화이다. 근데 이 아버지의 표정이 신기했다. 정말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노리코를 속인다. 프로 거짓말러 같았다. 세상 어느 평범한 아버지가 이렇게 완벽하게 거짓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아버지가 교수가 아닌 연기자 같아 보였다. 그게 이 영화의 유일한 단점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아니라면 아버지는 정말 진정한 사랑의 힘으로 그런 초월적인 거짓말 연기를 했던 것일 수도 있지만, 그 정도로 이 영화를 신격화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생각하기에 보통 가족이라면, 이렇게 딸을 속이는 과정에서 거짓말이 탄로가 난다. 그러면서 이런 대화가 오고 갈 것 같다. “이렇게라도 너를 시집가게 하고 싶었어.” 하지만 그런 과정이 있었다면 오즈 영화 같지 않았겠지. 아무튼 이 과정을 통해 노리코는 결국 시집을 가고, 아버지는 집에 홀로 남아 느릿느릿 과일을 깎는다. 집에 혼자 남은 아버지의 모습은 <동경 이야기>에서도 본 것 같다. <동경 이야기>에서 아버지는 아내를 잃었었고, <만춘>에서 아버지는 딸을 잃는다. 봄이 늦게나마 왔지만, 아버지에겐 봄이 아닌 듯하다. 그러나 모든 인간에게 봄은 잠깐이고, 결국엔 겨울이 다가온다. 자신이 언젠가 세상을 떠나게 될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 이것이 오즈 영화의 핵심인 것 같다. 아버지는 그걸 알고 딸에게 봄을 넘긴다. 이제 봄은 아버지 대신 딸의 차례인 것이다. 딸은 그걸 알고 있을까. 아직 모른다면 늦게나마 그걸 알게 되는 순간이 올까. 박명수 선생님 말대로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진짜 늦었을까, 아니면 그때라도 하는 것이 가장 빠른 것일까. 나는 죽기 전에 내 부모님에게 사랑을 고백할 자신이 없지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때라도 마음을 표현하시면 좋을 것 같다. 봄이 늦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