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링 디어> 당신은 신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를.
<킬링 디어> The Killing of a Sacred Deer
<킬링 디어>는 어리석은 인간의 이야기이다. 신이 노여워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분노를 표출할지는 몰랐던 한 인간의 이야기.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인간은 항상 이렇다.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이번에 고른 인간은 외과 의사 스티븐이다. 전작 <더 랍스터>에서 눈 먼 아내를 위해 자신의 눈을 찌를까 말까 망설이던 콜린 파렐은, 이번엔 안과 의사와 결혼했으며, 가끔 그녀를 전신 마취 상태에 빠뜨리곤 한다. 꼭 커플 메이킹 호텔에서 자신을 발기시키기만 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만들었던 여자들에게 복수를 하는 것만 같다.
영화가 시작되면 신과 인간의 관계는 벌써 뒤틀려있다. 인간은 큰 잘못을 저질렀고, 신은 이 사실을 당연히 모두 알고 있다. 신은 절대 내가 너에게 가겠노라, 하며 미리 전화하지 않고 인간의 일터에 나타나며, 인간은 그런 신에게 신이 딱히 필요로 하지 않는 제물을 바치고 있다. 무려 200미터까지 방수가 되는 시계. 인간은 왜 이리 물을 방어하는데 집착하는가. 혹시 노아의 방주의 탑승권을 얻지 못할 것을 걱정하는 것일까. 어쨌든간 신에게 이는 별로 중요치 않다. 오히려 다른 인간의 손목에 자신과 같은 시계가 걸려있다는 것이 더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 같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이 관계를 버티고 있다. 스스로 자신이 죄 지었음을 알고 있고, 그것만이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이 자꾸 자신을 귀찮게 해도, 이를 거부할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은 결국 이기적이다. 시간이 점점 지날수록 이 과정을 견딜 수가 없다. 아니 솔직히 말해 견디기 싫다. 억울하기까지 하다. 자기도 나름 죄를 인정했고, 스스로 죄를 사하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이 계속해서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이 야속하다. 인간은 은근슬쩍 신을 피하기 시작한다.
신은 그런 인간에게 경고를 준다. 그 와중에도 친절함을 잃지 않는다. 요즘 시대 일부 연인들처럼 카톡이나 전화로 통보하지 않고, 인간 앞에 직접 나타난다. 그 자리에서도 시간이 없다고 투정하는 인간을 위해, 매우 빠르고 자세하게 경고 4단계를 설명해준다. 그러나 이미 맘이 상한 인간은, 자신이 신을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이를 무시한다. 그러나 인간이 어찌 신을 이길 수 있을까. 신의 예언대로 모든 것이 이뤄지고, 신이 앉은뱅이를 걷게 하는 기적까지 보여주자, 인간은 결국 신에게 굴복한다. “한 명을 선택하라.” 이 상황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은, 최대한 공평하게 희생자를 선택하는 것뿐이다. 인간은 자신의 몸을 화살표 삼아, 돌려 돌려 돌림판을 진행하고, 세 번의 시도 끝에 한 명이 선택 당한다. 이 과정은 얼핏 공평해 보인다. 선택 당한 자는 정말 임의(random) 그 자체로, 운(運)에 의해 선택당한 것만 같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우리는 뺑뺑이를 통해 공평한 과정으로 집에 가까운 고등학교에 배치 받은 아이에게 ‘운이 좋았다’고 말을 한다. 즉 ‘공평 = 운’이다. 그렇다면 그 ‘운’은 누가 집행하는가. 그것이야말로 신의 영역이 아니었던가. 이 중요한 순간에도 신은 인간을 비웃고 있었다.
not, killing deer.
인간은 신의 규칙대로 ‘신성한 사슴’을 죽였고, 신의 심판은 여기서 끝이 난다. 하지만 정말로 끝인 걸까? “신은 가장 좋아하는 것을 가장 나중에 먹는다.” 첫 번째 희생당한 사슴이 신의 선택이었음을 인간은 잊지 않아야 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신의 식당. 신을 보고 황급히 자리를 뜨는 인간. 인간은 과연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더 이상 죄를 저지르지 않고, 마침내 남은 두 가족을 지킬 수 있을까? 질문이 틀렸다. 인간은 과연 남은 가족(deer)을 죽이지 않을 수(not killing) 있을까? 인간은 이번 일을 통해 확실한 교훈을 얻은 것일까. 아무쪼록 당신은 신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