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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 김한우 (영화 일기)

5월 21일. 세계영화사의 순간들/버닝(2)

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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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일요일엔 영상자료원에 갔다. 오랜만에 정성일 선생님의 토크를 듣기 위하여. 영상자료원에서 발간하는 영화천국이라는 잡지가 발간 10주년을 기념하여 영화천국데이를 마련하였는데, 그중 세계영화사의 순간들이라는 이름으로 선생님께서 한 말씀해주시는 행사였다. 이 행사에 당첨이 되고나서야 정성일 선생님이 영화천국에 연재하고 있는 글을 읽게 되었다.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글을 읽고 갔는데, 그 글은 정성일 선생님이 주관적으로 영화사의 어느 순간들을 선택하여, 그 순간이 왜 의미 있다고 생각했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글이었다. 엄밀히 보면 그 글은 설명이라기보다는 설득을 하고 있는 글이다. 역사에 관해 쓰는 것이 본래 그런 것 같다. 특히 영화의 역사는 아직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기에, 자신이 생각하는 이 사건이 왜 역사책에 기록되어야 하는지를 사람들에게 설득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나는 정 선생님을 믿기에 그가 역사라고 하면 나에게도 역사다. 하지만 선생님은 토크 중 이렇게 말했다. 각자가 자신의 역사를 쓰기를 원한다고. 자신의 글은 질문에 불과하다고. 그러나 역사는 아무나 쓰나. 사랑도 아무나 하는게 아니라던데 태진아 선생님께서. 하지만 언젠간 꼭 써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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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크 중 귀하게도 질문 시간이 주어졌다. 하고 싶었던 질문이 있었고, 이상하게도 질문 하는 사람이 거의 없길래 용기를 내어 물었다. 정 선생님은 이 연재에 관하여 자신은 한국 영화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을 거라고 못 박았다. 객관적이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에 내린 결론이라고 하셨고, 이해는 갔다. 하지만 나는 궁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영화 역사가 세계 역사에 닿게 되는 순간이 없었는가. 이정도면 세계영화사의 순간에 껴볼만 하지 않냐고, 외국 영화인들에게 추천해 볼 만한 사건이 없었는가. 꼭 객관적이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냥 정성일 선생님의 생각이 궁금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뿌듯했던 한국 영화의 순간. 가장 국뽕에 취했던 순간. 얼마 전 우리가 남북정상회담을 보며, 촛불이 넘실대는 광화문광장을 보며 캬 이게 한국이지. 이게 내가 사는 우리나라 한국이지.’를 느꼈던 순간처럼, 선생님이 느꼈던 국뽕이 언제였는지, 그냥 지극히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하지만 내 질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셨는지, 혹은 내가 질문을 잘 하지 못했는지, 그냥 그건 외국 사람에게 물어봐야한다.’는 원론적인 답변을 들었다. 아니 그건 100% 동감하는데 그래서 선생님의 생각은 무엇인가요,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선생님, 제 질문을 잘못 이해하신 것 같습니다만, 이라는 표현을 하고 싶지 않았다. 선생님에 대한 작은 리스펙. 그러나 섭섭한 마음이 약간 들었다. 조금 슬픈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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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닝>을 한 번 더 보는 것을 포기했다. 너무 에너지 소모가 많을 것 같았다. 한 번 더 보려했던 이유는 영화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전후 관계들과 디테일들, 그리고 스쳐지나가는 듯 뱉지만 뭔가 의미가 있는 것만 같은 대사들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 영화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그게 큰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는 <곡성> 같지만, <곡성> 같은 영화는 아니다. 그러니까 고양이가 실제로 있었는지, 해미는 어떻게 됐는지, 벤이 해미를 죽였는지, 벤은 진짜 비닐하우스를 태운게 맞는 건지 등의 수수께끼들을, <곡성>처럼 영화 속 숨겨진 단서나 떡밥을 찾아가며 퍼즐을 맞추는 영화가 아닌 거다.

 

 <버닝>은 해미가 얘기한 판토마임같은 영화다. “없다는 것을 잊는다.” 종수가 쓰는 소설도 실은 비슷한 특성을 갖고 있다. 우리는 소설을 읽는 순간, 영화를 보는 순간, 예를 들어 <어벤져스>를 보는 순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아이언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잠깐 잊는다. 그니까 무슨 얘기냐면, <버닝>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렇기에 어차피 퍼즐이 맞춰질 수 없는 이야기이다. 아니 맞춰진다해도 무슨 의미가 있냐는 거다. ‘귤 까먹는 판토마임에서 해미가 껍질을 다 까고 먹었든, 껍질째 먹었든 무슨 상관이냐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버닝>은 이창동 감독의 148분 동안의 판토마임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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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년 만에 신작을 발표한 이창동 감독. 그리고 영 소설을 쓰지 못하는 종수. 종수는 세상이 너무 수수께끼라 소설을 쓸 수 없다고 답한다. <버닝>의 마지막은 드디어 소설을 쓰기 시작한 종수의 뒷모습을 보여주며 끝이 난다. 이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조금 뜬금없지만, 나는 노트북으로 소설을 쓰고 있는 청년의 뒷모습을 보며 자기소개서를 쓰는 청년들이 떠올랐다. 우리 시대 청년들은 살아남기 위해, ‘리틀 헝거를 채우기 위해, 모두 각자의 소설을 쓰고 있다. 하지만 모든 청년들이 원래부터 소설을 잘 썼던 것은 아니다. 전부 처음엔 종수처럼 소설을 쓰지 못하고 방황한다. 소설을 쓰지 않고도 포르쉐를 타고 다니는 금수저들을 질투하고, 알바를 하려다가도 마음에 들지 않아 발걸음을 돌리게 되고, 할 수 있는 건 그저 좋았던 때를 떠올리며 실제로 혹은 머릿속으로 자위하는 것뿐이다. 그것 말고는 내 안의 조절되지 않는 분노를 해소할 길이 없다.

 

 그러다 마침내 소설이 쓰여지는 순간은 내 안의 뭔가를 태워버렸을 때다.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상한 점들로 가득한 벤이라는 사람 자체를, 이 풀 수 없는 문제들로 가득찬 시험지 자체를 태워버리면, 청년은 나 자신에게 없는 것들을 잊고’, 마치 있는 것처럼 소설을 쓸 수 있게 된다. <버닝>의 마지막 장면은 소설을 쓰지 못하던 청년이 일련의 사건을 겪은 뒤 드디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얼핏 희망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뭔가 불길함을 느꼈다. “이 소년의 미래는 과연 밝을 것인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선 청년들의 무수히 많은 소설이 쓰여지고 있다. 그 소설들로 이룩된 우리 사회의 미래는 어떨까. 그 사회가 집이라면, 혹시 그 집은 불 한 번 붙이면 간단히 타버리는 비닐하우스는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