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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 김한우 (영화 일기)

3월12일. 팬텀스레드/폴토머스앤더슨/120BPM/펀치드렁크러브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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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걱정이 현실이 되다. <팬텀 스레드>는 글을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마쳐야할지 각이 잘 잡히지 않는 영화였다. 중간에 자꾸 현실(카톡)이 끼어들어 집중을 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리고 분명 가장 좋은 자리, 진짜 정중앙 한가운데 자리를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 예매를 했었는데, 가보니 내 주위가 가득 차있었다. 다른 자리가 텅 비었었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널널한 사이드 자리로 옮겨서 봤다. 뭔가 억울해서 초반에 딴생각이 좀 들었었다. 아무튼 그렇다쳐도, 최상의 조건에서 영화를 봤더라도, 결과는 비슷했을 것이다. 혼란스러워, 원래는 잘 그러지 않는데, 글을 쓰기 전에 평론가의 리뷰를 먼저 보아버렸다. 이번 FILO 창간호의 이후경 평론가의 글이었다. <불화의 레퀴엠 : 폴 토머스 앤더슨의 <팬텀 스레드>에 새겨진 시간에 불길함을 느끼다>가 그 제목. 제목과 부제부터 어마어마하다.

 

 누군가의 관점이 들어간 글을 읽으면 그 관점에 설득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당연히 그 다음엔 그 관점에 박힌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상태에서 글을 쓰면, 분명 내가 쓴 글이긴 하나, 그 사람의 글을 내 것인 양 쓰고 있는 것에 불과하게 된다. 하지만 <팬텀 스레드>는 타인의 글을 볼 수밖에 없었다. 볼 필요가 있었다. 다른 사람의 견해를 통해 일단 이 영화를, 이 감독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싶었다.

당연히 FILO를 펴기 전, 정성일 아카이브에 들어가 봤다. 그러나 정성일 평론가는 이 감독에 대해 한 편의 글도 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무 글도 등록되어있지 않았다. 이정도로 영화계에서 주목 받고 인정받는 감독에 관하여 한 번도 쓰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하다. 아마 이 감독의 영화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여쭙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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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스트림 무비 시사회에 또 당첨되었다. 로빈 캉필로 감독의 <120 BPM>(120 Beats Per Minute, 2017). 작년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오른 작품으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작품이다. 내일 저녁 여덟시 영화인데, 충북에 촬영하러 다녀올 예정이라 시간이 될랑가 모르겠다. 하지만 보지 못해도 상관없다. 이번 주 금요일 명동씨네라이브러리에서 진행되는 <120 BPM> GV를 예매했기 때문이다. GV 진행자는 당연히 정성일 평론가님. 인사를 드릴까 말까 고민된다. 쫌 부끄럽다. 괜히 아는 척 친목친목하는 것 같아서. 한산 멤버랑 같이 가면 좋겠지만, 매진이라 같이 갈 수 있을지도 미지수이고, 가고 싶은 사람이 있을지도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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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임이 조금 시들해진 느낌이다. 참여율이 저조해졌다. 총인원이 그리 많지 않긴 하지만. 이번 수요일 모임은 셋이서 하게 됐다. 영상자료원의 다인감상실을 대여했다. 무료다. 꿀이다. 이번 주 영화 선정자가 불참하게 되어 참석자끼리 볼 영화를 정했다. 사심을 넣어서 PTA<펀치 드렁크 러브>(Punch-Drunk Love, 2002)를 보기로 했다. 하루 빨리 PTA의 全前작품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펀치 드렁크 러브>는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작품이다. 찾아보니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이 감독상을 받은 같은 회차였다. 그리고 그 유명한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작품 <피아니스트>가 황금종려상을 받았었다. 말 나온 김에 임권택 감독님 영화도 슬슬 보기 시작해야하는데, 오늘도 참 볼 영화 많다는 말로 마무리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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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마무리 지으면 안 되잖아. 다시 <팬텀 스레드>. 이야기를 하다 만 것 같다. <팬텀 스레드>는 일단 PTA의 다른 작품을 더 본 뒤, 각잡고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왓챠에는 각을 잡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고심해서 평을 적어봤다. thread가 실이니, '실'과 관련된 표현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실은 보통 꿰는 것이니, 꿰다라는 표현을 써야겠다, 이어서 팬텀(유령)은 보이지 않는 존재이니 꿰뚫어'보다'라는 표현이 떠올랐다. 그래서 완성된 표현. (팬텀을)꿰뚫어 본 뒤, (쓰레드를)꿰어내다. 뒤에 '작가'와 '예술'에 대한 언급은 이후경 평론가의 관점을 조금 빌려왔음을 고백한다. 이번 왓차 평은 나중에 바뀔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