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민주 항쟁과 장준환 감독
영화 <1987>을 보고나서 든 첫 생각은 “잘 만들어져서 다행이다.”였다. 6월 민주 항쟁을 다룬 첫 영화였기에, 기대보다 걱정되는 측면이 많았던 탓이다. 그 다음 든 생각은 영화의 주요 배경인 6월 민주 항쟁이 장준환 감독 본인과 닮은 점이 있다는 것이었다. <지구를 지켜라!>(2003), <화이 : 괴물을 삼킨 아이>(2013) 등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알 수 있듯, 장준환 감독은 마이너 성향이 짙은 감독이었다. 그 스스로 ‘또라이 미친 영화’라 표현한 그의 데뷔작 <지구를 지켜라!>는, 흥행엔 실패했지만 독특한 스타일로 평단과 매니아들의 고른 지지를 받았었다. 그랬던 장 감독이 <1987>이란 ‘보편적인’ 영화를 만들게 된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한 것은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여러 시사회에서 영화가 공개되자, 곧 그런 걱정은 기우였음이 밝혀졌다. 마이너 성향 영화만 잘 만들 것이라 예상됐던 감독은, 그의 신작 <1987>을 통해 자신이 그 누구보다 대중을 만족시킬 줄 아는 감독이라는 것을 증명해냈다.
장준환 감독은 거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영화에 본인 고유의 스타일까지 잘 녹아냈다. 감독은 한 시사회의 관객과의 대화에서 이 영화를 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해, ‘왜 아무도 아직까지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나하는 삐딱한 기질이 발현’되었다고 밝혔다. 생각해보면 6월 민주 항쟁 역시 어찌 보면 ‘삐딱한’ 사람들이 이룩한 성과이다. 민주국가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일들에 대해 목소리를 낸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대학가서 공부 안하고 딴짓한다고 손가락질을 했고, 나서지 말라며 혼냈다. 6월 민주 항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얘기하는 걸 멈추지 못하는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이뤄낸 성과이다. 영화 <1987>은 그런 의미에서 딱 맞는 감독을 만난 것이 아닌가 싶다.
주인공‘들‘의 영화 (1)
<1987>은 원래 기획단계에서 ‘보통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준비되고 있었다가 비슷한 시기에 먼저 개봉한 <보통사람>(2017)으로 인해 제목을 바꾸었다고 하는데, 결과적으로 잘된 거라는 생각이 든다. 원래 ‘인물’을 지칭했던 제목에서 ‘사건’을 가리키는 제목으로 바뀐 셈인데, 영화 역시 인물보다 사건을 따라가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장준환 감독 역시 처음 시나리오를 받고 이야기가 ‘사건을 따라간다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고 한다.
사건을 따라가는 이 영화는, 역설적이게도 다른 영화들보다 주인공이 더 많다. 6월 민주 항쟁은 영화의 초기 제목처럼 ‘보통 사람들’에 의해 일어난 사건인데, 여기서 더 중점을 두어야 하는 단어는 ‘들’이다. 6월 민주 항쟁은 한 인물의 주도하에 일어난 사건이 아닌, 여러 인물들로 인해 완성된 사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화 <1987> 역시 한 명의 영웅이 극을 이끌어나가는 일반적인 영화와 달리, 여러 명의 사람들이 극을 이끈다. 그래서 사건을 따라가는 방식이 선택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사건을 따라가다 보면 영화가 자연스럽게 사건에 영향을 미친 인물들을 하나하나 조명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영화에서 조명을 받은 인물들은 그때마다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그 행동의 결과로 다음 사건이 이어진다. 가령 한 교도관의 양심적인 행동으로 인해 숨겨진 진실이 드러나고, 그 드러난 진실로 인해 또 다른 인물들의 움직임이 일어나는 식이다. 그 과정에서 인상적인 것은 각 인물들이 절대 주인공으로써 돋보이려는 ‘영화적인 욕망’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에 전혀 끼어들지 않으면서, 자신을 비추는 조명이 꺼지면 다음 타자에게 미련 없이 바통을 넘긴다. 그럼으로써 바통을 이어 받은 모두가 주인공이 되고, 이야기에서 동등한 비중을 가지게 된다.
주인공‘들‘의 영화 (2)
모두가 주인공이고, 모든 사람이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은 이 영화의 핵심 메시지이다. 이는 6월 민주 항쟁의 본질이기도 했고, 최근 우리가 직접 이뤄냈던 촛불 혁명 역시 시민 모두가 함께 만들어냈다는 점이 중요한 교훈이었다. 허나 영화는 ‘주연’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 메시지를 담아내기에 태생적인 한계가 있는 매체이다. 인생은 모두가 주연인데 반해, 영화는 주연이 한정되어있다.
시간의 예술인 영화에서 주연과 조연을 나누는 기준은 분량이다. 만약 주연을 여러 명으로 하고 싶다면, 감독이 억지로 그들이 나오는 시간을 동등하게 맞추면 얼추 비슷한 비중으로 느껴질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나면 이제 더 실질적인 문제가 등장한다. 바로 배우의 얼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에서 ‘이름값’, ‘인지도’, ‘스타성’ 등으로 머릿속에 무의식적으로 분류되어 있는 배우의 얼굴을 보고, 관객은 자기도 모르게 영화 속 배역의 ‘급’을 나누어버린다. 여러 명의 주연을 내세운 영화에서 아무리 주연들이 같은 분량을 가져갔다하더라도 A라는 배우가 다른 배우들보다 ‘스타’라면, 관객들 머릿속에선 A 배우가 연기한 캐릭터가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버리고, 다른 캐릭터들은 조연이 되어 버린다. 동시에 모두가 중요하다는 메시지마저 훼손된다.
그럼 그 한계를 어떻게 극복해야할까.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1987>은 여러 명의 스타를 캐스팅해버렸다. 영화를 아직 보지 못한 분들을 위해 이곳에 그 이름들을 전부 적지 못해 아쉽지만, 나열해본다면 아마 한국영화 역사상 최고로 호화스러운 캐스팅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1987>은 많은 스타들의 출연으로 인해, 관객들로 하여금 영화 속 캐릭터들이 분량과 상관없이 사건에서 중요한 인물임을 단박에 느낄 수 있게 만든다. 간혹 화려한 캐스팅으로 인해 스타 배우들의 분량을 채워주려다 결과적으로 완성도가 떨어지는 영화가 만들어지곤 하는데, <1987>은 ‘작은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6월 민주 항쟁의 의미와, 이를 담은 첫 영화의 의미를 이해하고 출연해준 배우들 덕분에 긍정적인 시너지가 났다고 볼 수 있다.
유일한 허구 캐릭터 ‘연희’ 캐릭터의 의미
그런 비현실적인 캐스팅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전체적으로 덜 영화적인, 오히려 다큐멘터리라고 느껴질 정도로 묵직한 분위기를 유지한다. 그 외에도 실존 인물과 언론사 이름 등을 그대로 쓰는 등 현실감을 살리기 위한 노력이 많이 보인다. 배경이나 소품 등도 신경을 많이 쓴 듯하다.
그 중에 유일한 허구 캐릭터는 김태리 배우가 연기한 연희이다. 연희는 영화 중반부를 지나서부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캐릭터인데, 처음엔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무심한 태도를 보이다가, 사건을 겪으며 점점 세상일에 눈을 뜨는, 어찌 보면 전형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 캐릭터다. 올해 흥행했던 <택시운전사>의 만섭(송강호)과도 비슷하다.
감독이 연희라는 캐릭터만 허구로 넣은 것은 기능적인 측면이 크다. 첫째로 관객들이 <택시운전사>의 만섭처럼 제3자의 시선에서 영화에 몰입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두 번째로 박종철 열사로 시작해서 이한열 열사로 끝나는 영화의 구조에서 연결고리 역할을 할 인물이 필요했기 때문. 이 역시 스포라 자세히 말하지는 못하지만, 영화에서 대한민국 역사의 한 장면을 목격하는 순간 연희 캐릭터의 중요성에 대해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김윤석 배우의 열연
악에 대한 묘사가 김윤석 배우가 연기한 박처장에게로만 향한 건 조금 아쉬운 지점이었다. 여러 인물들이 6월 민주 항쟁을 만들어가는 동안, 이를 방해하고 탄압하는 모든 행동은 박처장이 도맡아한다. 누가 박처장에게 그러한 지시를 했는지, 박처장은 무엇을 지키기 위해 그러한 행동을 하고 있는지, 이에 대해 영화는 더 깊게 들어가지 않는다. 정확하게 밝혀진 사실이 없는 부분에 대해 섣불리 무언가 주장하지 않는다. 한 쪽 편을 함부로 들어주지 않는 영화의 흥행을 생각한 선택 역시 감독의 변화 중 하나이다. 하지만 그런 아쉬움과 별개로 그 모든 악을 두 시간 내내 홀로 받아들이고 있는 김윤석 배우의 연기는 대단하다. 영화에 굳이 한 명의 주연을 뽑는다면 김 배우를 뽑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싶다.
<1987> 당신의 인생영화가 될 영화
박종철 열사를 기리고, 이한열 열사의 역사적인 장면을 목격하는 것. 그 반대 의미로 역사적인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의 재현. 거기에 더해 영화의 마지막, 작년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보았던 촛불 혁명의 벅찬 감동과 맞먹는 6월 민주 항쟁의 한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충분히 볼 가치가 있는 영화이다. 2017년을 5일 남기고 개봉한 이 영화를 2017년 영화라고 해야 할까, 2018년의 영화라고 해야 할까. 뭐 상관없다. 위에 언급한 장면들을 보는 순간, 이 영화는 당신의 인생영화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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