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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토마스 앤더슨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아니 ‘알다가도’라고 잠시라도 생각했던 것 자체가 큰 오산이었던 것 같다. 오늘 <인히어런트 바이스>를 보고 느낀 감상은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이 감독은 영화를 영화 자체로 보기 힘들게 한다. 그래 이제 이 감독의 영화는 거의 다 봤으니, 이 감독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리노의 도박사>(1996)와 <부기 나이트>(1997) 빼고 다 봤다. 이 감독의 영화는 항상 영화 외부 요소가 영화에 끼어든다. 아니 영화에서 보이는 이미지는 그냥 다 껍데기고, 그 숨어 있는 상징들이 영화의 전부가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미국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잘 알고 있다고 해도 그 역사에 관한 나의 주관이 없다면, 영화를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감독의 영화에 관한 글을 쓰려면 미국의 역사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이상했다. 영화를 그냥 보이는 것 그대로 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인가. 이는 분명 내가 추구하는 것과 다른 방향이다. 나는 그냥 영화를 보이는 그대로 표현하여 같은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다른 어떤 것의 도움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었다. 어떤 참고서적 없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글. 그냥 온전히 우리가 함께 본 영화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글. 그런 글을 쓰고 싶었는데, 이 감독의 영화는 영화만으로는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내가 아직 모자란 걸까. 나만 뭔가 못보고 있는 건 아닐까. 고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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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herent Vice’. inherent : 내재하는, 타고난, 불가분의. Vice : 범죄, 악, 이라는 뜻인데 inherent vice 라고 합치면 따로 뜻이 있는 단어였다. ‘고유의 하자’라는 뜻으로 어떤 것이 그 본질적으로 하자를 갖고 있는 것을 말한다고. 예를 들어 과일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부패하는 것, 혹은 도자기가 깨지기 쉬워 어쩔 수 없이 부서지는 것 등을 말한다. 그러니까 <인히어런트 바이스>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고유 하자에 관한 영화이다. 미국의 발전 과정, 지금의 ‘GREAT AMERICA’가 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생겼던 하자(瑕疵)들을 비추는 영화인 것이다. 그니까 전여친이 사라지고, 닥은 사설탐정이라는 아무에게도 공인받지 않는 직업을 가지고 전여친을 찾아다니고, 그 과정에서 히피라고 다른 경찰들에게 무시당하고, 마약 사업 집단을 만나고 뭐 이런 것들이 모두 뭔가의 상징이라는 것인데, 위에도 말했듯 그 디테일한 역사를 모르니 해석하기 어렵다. 그러니까 이런 영화에 대해 한줄평을 굳이 남긴다면, 이동진 식의 인상평가밖에 하지 못할 것이다. “놀랍게도 놀라운”, “마약 열다섯 봉지를 한 번에 들이마신 듯”, “영화가 이룰 수 있는 놀라운 성취” 같은 평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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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아킨 피닉스 너무 매력적이다. 특히 목소리, 그리고 발음이. 이번 영화에서는 마약에 쩔어 사는 사립탐정, 말이 사립탐정이지 그냥 부랑자 같은 닥(Doc)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을 연기했다. 그 발음에 정말로 반해버렸던 것은 <마스터> 때였는데, 이 영화 역시 발음이 아주 찰졌다. 자꾸 따라하고 싶었고, 실제로 따라했다. 이 영화에서 내게 닿은 대사는 이 장면이다. 그의 친구 중 한 명이 닥에게 머리를 바꾸기를 권한다. 머리를 바꾸면 인생이 달라진다면서. 닥이 어떻게 하는 게 좋은지 묻자 친구는 ‘너에게 달렸으니 직감을 따르라’고 한다.(“It’s up to you. Follow your intuition.”) 그리고 닥은 직감을 따라 파마를 한다. 머리를 바꾸라고 한 다음에 네 맘대로 하라는 것도 궁금한 부분이었지만, 닥이 왜 파마를 했는지도 의문이다. 아무튼 난 내 머리는 내 맘대로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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