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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메가박스 킨텍스에서 <라이크 크레이지> 관람. 원래 <디트로이트>를 보고 싶었는데 주변에서 보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나의 또 다른 고향 롯데시네마 주엽이 최근 백화점에서 난 화재 때문인지 운영을 하지 않았다. 왜 때문에 화제가 났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화재가 크게 스노우볼을 굴린 것 같다. 그 스노우볼의 결과는 기분 나쁨. <라이크 크레이지>는 간만에 본 구린 영화였다. 오랜만에 왓챠 별점 1점을 주었다. 확인해보니 여기에 오른 리스트로 <시인의 사랑>, <맨헌트>, <특별시민>, <흥부 : 글로 세상을 바꾼 자>, <미 비포 유> 등이 있었다. 나는 왓챠에 총 550편의 별점을 기록했고 그중 별 1개, 1.5개인 영화는 고작 아홉 편에 불과하다. 내 생각에 나는 나름 영화 선구안이 있는 것 같다. 이는 절대적이라기보다는 상대적/주관적인 기준, 혹은 취향이다. 다시 말해 나는 내가 좋아할 것 같은 영화만 고른다. 550편 중 구린 영화가 9편뿐이라는 뜻은 약 98%의 확률로 내가 선택한 영화가 좋았다는 것이고, 별로일 것 같은 영화는 미리 거르고 안 봤다는 뜻이다. 거른 영화들이 진짜 별로였는지는 알 수 없다. 보지 못했으니까.(당연) 하지만 선택한 영화가 진짜 별로인 확률은 낮았다. 결론적으로 <라이크 크레이지>는 미리 선택하지 않았어야 하는 영화였다. 오랜만에 영화 측정기에 오류가 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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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크 크레이지>가 보고 싶었던 이유, <라이크 크레이지>를 선택했던 이유는 진짜 딱 하나 펠리시티 존스 때문이었다. 앞으로 여배우 이름 하나만으로 영화를 선택하는 것을 자제해야겠다. 좋았던 기억이 별로 없다. 루니 마라 때문에 <로즈>를 봤다가 조금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반면 알리시아 비칸데르는 내게 좋은 기억을 줬다.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선택한 <유포리아>는 단순 이 배우 이름 하나 때문에 내린 선택이었고, 그녀는 내게 좋은 영화로 보답했다. 알리시아 비칸데르는 이 영화에 제작자로서도 참여하였으니 이는 정말로 ‘보답’이라고 표현해도 될 것이다. 하지만 에밀리아 클라크의 <미 비포 유>도 그랬고, 아무튼 배우만으로 영화를 선택하는 것은 꽤 리스크가 큰 것 같다. 그러나 <라이크 크레이지>의 경우, 영화의 줄거리도 영화를 선택하는데 한 몫을 한 것도 사실이다. 씨네21의 박지훈 평론가가 쓴 프리뷰에 속아 넘어가버렸다. 그는 또한 이 영화에 별점을 9점이나 줬다. ‘사랑의 끝에서 발견하는 시간의 의미’라는 한 줄 평. 혹시 비슷한 경험이라도 있으신 게 아닌가 싶다. 아니라면 죄송하다. 박평식 평론가는 6점에 ‘미련과 변덕, 적당히 미칠 것’이라고 찰지게 쓰셨지만 내가 현 웃음을 터트린 단평은 따로 있었다. 송형국 평론가. 5점. ‘7년 전 작품이라는 게 믿어진다’ 정말 빵 터졌다. 이 평론가가 원래 이렇게 재밌으셨나. 다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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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형국 평론가의 ‘7년 전 작품이라는 게 믿어진다’라는 말에 동의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딴지를 걸고 싶다. 나는 솔직히 이 영화가 7년 전 작품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이 영화는 2011년에 발표된 영화인데, 나는 이 영화가 2000년대에 만들어진 게 아닌가하는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7년 전 작품이 아니라 17년은 된 영화 같다. 두 번째로 박평식 평론가의 ‘적당히 미칠 것’에도 딴지를 걸어본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적당히가 아니라 애초에 하나도 미치지 않았다. 내 눈에는 전부 미친 척하는 것처럼 보였고, 사랑하지 않는데 사랑하는 척하는 것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제목 ‘Like Crazy’에서 방점이 찍혀야하는 것은 ‘crazy’가 아니라 ‘like’이다. ~와 같은. ~것처럼. 이 영화는 미친 영화가 아니라, ‘것처럼’ 하고 있는 영화이다. 인물들은 보여지는 행동 없이 갑자기 감정의 결과를 연기한다. 이 영화는 시간의 생략이 과감한데, 그 생략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제이콥과 애나는 갑자기 서로를 사랑하고 있고, 갑자기 서로를 사랑하지 않고 있다. 나는 둘이 사랑에 빠지는 영화의 초반부를 제외하고는 영화를 보는 내내 이 남녀의 감정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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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것처럼>에서 ‘것처럼’ 하고 있는 것이 또 하나 있는데, 나는 이것이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바로 영화를 잘 만드는 것처럼 하고 있는 감독. 센스 있는 것처럼 하고 있는 감독. 이 영화에는 쓸데없는 편집 기교가 상당히 많이 들어가 있다. 앞서 말한 ‘과감한 시간의 생략’에 주로 그런 기술들이 많이 쓰이고 있는데, 이런 장면을 볼 때마다 한숨이 나왔다. 가뜩이나 남녀의 감정을 생략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데 거기서 개인기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맨유의 나니가 필요할 때 패스 안하고 구석에서 개인기 부리고 있는 느낌이랄까. 가장 별로였던 장면은 공항 장면이다. 몇 번째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 제이콥과 애나는 결국 영국에서 혼인서약을 한다. 하지만 그 둘이 진짜로 함께하기까지엔 6개월의 시간이 필요한 상황. 6개월만 버티면 이 둘은 마침내 함께 살을 맞대며 살 수 있게 된다. 나는 이 위태위태한 커플이 어떻게 그 6개월을 버틸는지, 그 과정이 너무나 궁금했다. 그것이 ‘장거리 연애’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관객들에게 ‘like crazy’의 ‘crazy’를 수긍하게 만들, 아 이 커플이 진짜 서로를 미친 듯이 사랑하는구나, 를 믿게 만들 마지막 찬스! 하지만 감독은 이를 과감히 과감하게 생략한다. 어떻게? 멋있는 것처럼. 편집 센스 있는 것처럼. 감독은 작별 인사를 마치고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애나를 공항에 그대로 세워놓은 채, 주변 사람들이 지나가는 배경을 빨리감기한다. 설마 했는데 6개월이 지나가 있다. 그렇게 <라이크 크레이지>는 끝내 내게 ‘크레이지’를 설득하지 못 했다. 영화의 그 뒤가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생략하려고 한다. 또한 앞으로 이 감독의 영화도 과감히 생략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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