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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을 봤다. 노린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엊그저께 본 <늦봄>과 끝말잇기를 한 것 같다. 갑자기 이 영화를 고른 것은, 이 작품이 아시아영화 100 리스트의 공동 12위에 오른 작품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연일 미투 관련 기사가 뜨고 있는 김기덕 감독이 더 나락에 빠지기 전에 그의 영화를 감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고발된 것에 따르면 김기덕 감독은 미투 중에서도 정도가 심각한 미투 행동을 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는데, 솔직히 김 감독의 영화는 그전까지 넘사벽의 경지로 평가됐었다. 한국의 몇 안 되는 작가주의 감독 중 한 명. 그래서 그가 정말 모든 명예를 잃기 전에, 이미 상당히 기정사실화되었지만 확정 선고가 나기 전에 그의 영화를 온전히 영화 자체로 감상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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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다행히 기사로 봤었던 우려되는 상황이 상상되지 않는 영화였다. 여성 출연 자체가 적고, 성관계 장면이 나오지만 폭력적이지 않다. 보면서 다행이다 싶었다. 그런 장면이 나왔다면 영화를 보며 뭔가 거슬렸을 것이다. 영화는 제목처럼 사계절 + 다시 봄이 나오는 영화다. 영화가 시작하면 ‘봄’ 이라는 자막이 뜨고, 곧이어 문이 열리는데 강 위에 절이 하나 떠 있는 모습이 나온다. 나는 벌써 끝났다고 생각했다. 강 위에 떠 있는 절. 이 설정 자체가 너무 매력적이었다. 풍경이 멋있는 건 덤이다. 뿐만 아니라 벽 없는 문, 절 앞마당 바닥에 칼로 새기는 반야심경, 그 위에 입히는 색, 물고기, 개구리, 뱀에 돌을 다는 행위, 초능력(?)을 발휘해 배를 옮기는 노승, 눈과 입과 귀와 코를 막는 閉(폐)자가 적힌 종이, 노승의 셀프 다비식까지 인상적인 장면들이 많았다. 뭔가 엄청나게 한국스러운 영화. 내가 찾던 한국 영화. 적어도 이 영화만큼은 김기덕 감독의 재능이 아깝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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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우리가 짓고 사는 죄에 대해 생각해보게 했다. 이동진 평론가는 이를 원죄라고 해석하며 이 영화가 불교적이라기보다는 기독교적인 영화라고 평가했다. 나는 그의 글에서 그가 불교적이라고 평가한 사람들을 약간 내려다보는 듯한 인상도 받았다. 김기덕 감독은 지금까지 꾸준히 기독교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며, 유럽인들도 김기덕 그런 면 때문에 이 감독에 열광하는 거라며, 근거를 내세웠다. 2003년에 쓰인 글을 상대로 섀도우박싱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무튼 2003년의 이동진은 지금보다는 더 날카로운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일리 있는 논리지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기독교 얘기를 해왔다고 해서 불교 얘기를 영원히 안 할 거라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아무리 다르게 보려 해도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불교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불교 카테고리의 영화이다, 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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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평론가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고 이제 내 이야기. 영화를 보며 인간이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며, 결국 누구도 남의 죄를 나무랄 수 없겠구나, 라는 생각까지 다다르게 됐다. 그러나 이는 자칫하면 이렇게 들릴 수도 있다. 특히 죄를 많이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가 저지른 성 관련 죄들에 대한 변호로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다, 너희들도 그럴 수 있다, 그러면서 나에게 뭐라 할 자격이 있는가” 라며 악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텍스트만큼은, 의미가 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복음 8장7절)”는 성경 중에서도 손꼽히는 구절이다. 여러 곳에서 많이 인용되기도 한다. 이 영화도 영화 외적인 요소를 떼고 봤을 때, 이 주제를 정말 제대로, 효과적으로, 설득력 있게, 그러면서도 창의적으로 그려낸 영화임엔 분명하다. 작가주의영화에서 작가의 이름을 떼놓고 본다는 것은 꽤 모순적이지만, 그래도 강제로 김기덕이란 이름을 떼놓고 보면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정말 좋은 영화이다. 그러나 영화에 직접 출연까지 하여 꽤 중요한 역할을 몸소 수행해내고 있는 감독의 몸뚱아리를 떠올리면, 이 수술이 굉장한 난이도의 수술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의 다음 작품을 보기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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