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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 김한우 (영화 일기)

7월 1일. 환상의 빛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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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데뷔작 <환상의 빛>을 보았다. 한국엔 <태풍이 지나가고>의 개봉을 앞두고 2016년에 첫  개봉했었다. 95년 데뷔작을 만든지 이십여 년이 지나 이젠 세계적 거장이 된 고레에다 히로카즈. 마케팅사는 이를 노리고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데뷔작이라며 이 영화를 팔았다. 하지만 내가 봤을 때 <환상의 빛>은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데뷔작이라기엔 꽤 부족한 영화였다. 아니 내 기준엔 썩 아름다운 영화도 아니었다. 물론 몇 몇 장면이 아름답긴 하다. 그러나 이는 일본이 예쁜 거지, 이 감독이 뭔가 감독으로써 마법을 부렸다는 느낌은 아니다. 일본이 다 했다. 아니 일본이랑 주인공 에스미 마키코가 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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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상의 빛>은 롱테이크가 꽤 많다. 그러나 나는 이 중 대부분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쓸데없이 길었고, 쓸데없이 느렸다. 롱테이크 씬은 주로 위에서 말한 예쁜일본을 보여주는 것과, 그 예쁜 일본을 배경으로 인물들이 이동하는 모습을 느릿느릿 보여주는데 사용되고 있었는데, 나는 도대체 이 이동하는 모습을 길~게 보여주는 것이, 이 영화에 왜 필요한 것인지 그 의도를 알 수 없었다. 특히 소설 원작을 영화화 한 이 영화에서. 그냥 진짜 예쁜 풍경을 많이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계속해서 들 뿐이다. <환상의 빛>은 나에게 롱테이크에 대한 환상을 깨버린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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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 좋은 소리를 많이 했으나, <환상의 빛>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는 진하다. 근데 또 따지고 보면 이 또한 원작 소설에서 가지고 온 것이니, 딱히 감독을 칭찬할 건 아니긴 하다. 유미코는 어릴 적 할머니를 잃은 기억이 있다. 그러나 유미코는 할머니가 떠나는 순간에 할머니를 막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떠나는 할머니를 쫓아가 따라 잡았던 유미코. 하지만 할머니는 완고하게 자신의 죽음은 자신이 선택하고 싶다며 돌아오지 않는다. 어른이 된 유미코는 종종 그날에 대한 꿈을 꾼다. 왜 더 확실히 잡지 않았을까, 후회하며. 그렇게 남편과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던 어느 날, 남편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철길을 혼자 걷고 있었다는 남편. 그는 방울 열쇠고리만을 남기고 그렇게 유미코를 떠난다. 유미코는 남편이 왜 자살을 선택했는지 그 이유를 도무지 헤아릴 수가 없다. 이야기는 또 그로부터 7년 후를 보여준다. 유미코의 이 불행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는 듯이. 이미 영화 여러 편 분량의 비극을 겪은 유미코의 다음 이야기를 이어 들려준다. 유미코는 재혼을 한다. 하지만 당연히 행복하지 않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새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마음속으로는 두 가지 질문이 끊임없이 유미코의 머릿속을 맴돈다. 할머니는 왜? 남편은 왜? 혹시 내가 뭔가 못 알아차렸던 것이 있었을까? 내가 조금만 더 눈치가 빨랐다면, 둘의 죽음을 막을 수 있진 않았을까? 아무리 카메라를 오래 갖다 대도 흔들리지 않던 유미코는,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끈질긴 감독의 카메라에 못이기는 듯 드디어 그 마음 속 응어리를 큰소리로 토해낸다. 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롱테이크는 어찌 보면 다큐멘터리 출신 감독의 자연스러운 기법일 수도 있겠다. 촬영하는 인물이 마침내 진심을 내뱉을 때까지 카메라를 갖다 대는 것. 별로 선호하는 방법은 아니긴 하지만 말이다. 마침내 현재 남편에게 진심을 고백한 유미코. 유미코는 마음이 풀린 것일까. 앞으로 유미코는 편히 살아갈 수 있을까? 이제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게 됐을까? 영화는 이에 대해 딱히 유미코의 리액션이나, 변화된 모습을 뚜렷이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저 일상의 반복처럼 보이는 마지막 장면. 어쩌면 감독의 무책임한 엔딩으로 느껴질 수도. 감독이 선택한 결말을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본다. 유미코는 이번엔 떠나는 할머니의 뒷모습이 아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자신의 가족들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빛은 아마도 그들을 비추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