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전쟁
War Of The Worlds, 2005
스티븐 스필버그
<우주전쟁>, 그 시작과 끝에 대하여
너무나 익숙한 모건 프리먼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되는 영화. 스티븐 스필버그는 (영화를 만드는데 있어서) 항상 옳은 선택을 한다는 명제를 새삼 확인시켜준다. 모건 프리먼의 목소리는 언제나 옳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어떤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들려주더라도 아무 의심 없이 그 이야기를 믿게 된다. 그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우리는 순식간에 할아버지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이야기를 듣는 어린 아이가 되어 버린다. <우주전쟁>에 관한 글을 이렇게 시작하는 이유는, 이 영화의 이야기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만큼 비현실적이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야기를 할 때 중요한 건 이 이야기가 말이 되냐 안 되느냐가 아니라, 바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에서 가장 좋은 캐스팅은 바로 모건 프리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모건 프리먼은 그 근엄한 목소리로 뜬금없이 인간들에게 경고를 내린다. 인간보다 더 지적인 존재가 지구를 지켜보고 있었다고. 지구인들이 각자의 삶을 걱정하느라 바쁠 때, 그들은 우리를 관찰했을 뿐만 아니라, 연구(study)하고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인류가 지구를 자신의 것이라 확신하고 자만에 빠져 있는 모습을, 그 지적 존재들이 ‘envious eyes’로 보고 있었다고 말해준다.
여기서 envious. ‘envy’라는 단어가 미묘하다. 우선 envy라는 단어의 정확한 뜻이 무엇인가. 부러움/선망인가, 혹은 질투/시기인가. 그다지 중요치 않은 부분일 수도 있지만, 이는 긍정적인 시선인지 부정적인 시선인지에 따라 이야기의 성격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 시선이 바로 이 <우주전쟁>이라는 이야기의 시작이며, 그러므로 이 영화의 정체성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생각. envy가 긍정의 의미든 부정의 의미든, 그것이 감정적인 요소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게 본다면, 지구를 침공한 ‘인간보다 지적으로 우월한 이 존재들’은 지능은 높지만,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감정에 지배되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지적인 능력으로 경지에 오른 사람들을 ‘현자(賢者)’, 혹은 ‘성인(聖人)’이라고 표현하곤 하는데,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은, ‘이성이 감정에 지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물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존재이며, 절대 감정에 휘둘려 남을 부러워하거나 질투의 눈으로 보지 않는다. 더욱이 그런 감정이 동기가 되어 누군가의 생명을 앗는, 그런 뒤 없는 선택을 내리지 않는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이 침공자들은 현자는 아니다. 인간보다 똑똑하긴 하지만, 감정에 휘둘리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우리보다 우월하긴 하나, 그 차이가 엄청나게 크진 않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감정에 휩쓸려 이성적인 선택을 내리지 못할 가능성, 즉 허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것이 <우주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우리가 그나마 파악할 수 있는 이 세계의 룰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오랫동안 인간을 관찰하고, 연구한 뒤, 지금 침공하면 성공하겠다는 결과가 도출되자(이 부분은 상상), 마침내 지구를 침공한다. 그들은 레이 페리어(톰 크루즈)가 하필 이혼한 아내로부터 자신의 두 아이를 부탁 받은 날, 아버지로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날 지구를 침공한다. 마치 지금이 인류가 가장 무방비한 순간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런 류의 인간관계를 겪어본 적이 있는 것처럼, 이때가 감정적으로 가장 불안정한 순간임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처럼, 이 순간을 노린다. 이런 그들의 연구는 얼마나 오랫동안 축적해온 결과일까. 나레이션에서 ‘이들이 인간보다 더 지적인 존재라고 말한 것’이 ‘진짜’라면, 이들은 지적인 것뿐만 아니라 치밀하기까지 하다고 봐야한다. 재능이 있는데 노력까지 했다는 것이다. 아니면 이 치밀함 역시도 ‘더 우월한 지적 능력’ 중 하나일 수도 있겠다.
이제 (드디어) 영화가 시작된다. 우리는 톰 크루즈를 만나고, 다코타 패닝을 만난다. 천둥 없는 번개가 치고, 땅이 갈라지며 나타나는 그것들. 그것의 광선을 맞은 사람들은 피 한 방울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날아다니는 옷가지들. 톰이 운전하는 차를 요리조리 비추는 롱테이크 씬. 다코타 패닝의 비명소리. 피넛버터가 발린 빵이 유리창에 던져지는 장면. 추락한 비행기. 그걸 이용하는 언론. 차를 둘러싸는 사람들. 다코타 패닝의 비명소리. 뒤집어지는 배. 다코타 패닝의 비명소리. 떠나는 아들. 다코타 패닝의 비명소리. 지하실. 외계생명체. 그리고 갑자기 힘을 잃는 외계생명체(!).
이제 (벌써) 결말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사실 난 이 영화의 다른 부분에는 큰 관심이 없다.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부분은 이 영화의 나레이션과 결말, 즉 시작과 끝뿐이다. 이 영화는 특히 결말에 대해 말이 많았다. 압도적인 파워로 인간들을 압살하던 그들은 영화가 끝날 시간이 되자 갑자기 무기력하게 쓰러진다. 이건 비유가 아니다. ‘영화가 끝날 시간이 됐다’를 제외하곤 그럴듯한 이유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번에도 친절한 모건 프리먼이 그들이 패한 이유에 대해 설명을 해주지만, 이번엔 왠지 설득이 되지 않는다. 많은 관객들이 이 결말에 대해 분노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정말 말이 안 된다. 이들이 얼마나 지적인 존재인데. 치밀한 연구를 해서 몇 천 년 전에 이미 땅에다 기계를 묻어놓은 그들인데. 고작 미생물 때문에 실패했다는 것은 아무리 모건 프리먼의 목소리로 설득을 한다해도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모건 프리먼 스스로 모순되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믿고 싶은 거다. 그들은 영화가 끝날 때가 돼서 스스로 퇴장한 거다. 그게 진짜 영리한 거고, 그게 진짜 지적인 거다. 떠날 때를 아는 것. 퇴장해야 할 때를 아는 것. 이정도면 충분히 인간들에게 경각심을 줬다고 판단한 그들은, 딱 그만큼만 하고 물러선다. 더 했다간 영화라는 설정 자체가 무너질 수 있기에.
이 경험을 통해서 그들보다는 덜 지적이지만, 보통 인간들보다는 조금 더 지적인 인간들은, 그들의 큰 뜻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겸손한 삶을 살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사람들은 다시 원래 그대로의 삶을 살 것이다. 당신은 어떠한 인간이 되기를 선택할 것인가. 영화에서 나레이터의 말은 절대적이다. 하지만 <우주전쟁>의 나레이터는 분명 스스로 모순적인 말을 뱉었다. 그 절대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것인지 아닌지, 영화 밖의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 역시 우리가 무언가 선택해주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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