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
<시계태엽 오렌지>(1971) 관람.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와 더불어 제목부터 끌렸던 영화 중 한 편이다. 영화도 역시 참 좋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본 것 중에서는 4위.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 <샤이닝> 다음으로 좋았다. 하지만 제목만큼은 가장 매력적인 영화이다. 나는 아날로그 시계의 느낌을 좋아함과 동시에 오렌지 혹은 오렌지 색을 좋아한다. 그러나 영화에는 시계태엽도, 오렌지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감독을 탓할 수 없는게, 이 영화는 <샤이닝>,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등과 마찬가지로 소설 원작이 있는 작품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제목을 지은 것은 소설가 앤서니 버지스이고, 작품에 시계태엽과 오렌지를 등장시키지 않은 것도 앤서니 버지스이다. 그렇다고 영화와 소설이 완전 똑같은 건 아니다. 스탠리 큐브릭은 역시 의도적으로 영화의 결말을 바꾼다. 그러고 보면 이 감독은 자주 소설의 결말을 바꾸며 영화를 만드는 것 같다. 그리고 나도 이런걸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는 진짜 오리지날 이야기를 쓰는 것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는데, 소설을 가져와 결말을 싹 바꾸며 완전히 자신의 이야기로 만드는 것 또한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큐브릭처럼 ‘잘’ 바꿔야한다는 것이 전제 조건이긴 하지만 말이다.
-
<시계태엽 오렌지>는 내가 느끼기엔 상당한 사회비판적인 영화였다. 딴걸 다 떠나서 중간에 ‘폭력 예시 자료 화면’으로 ‘히틀러 나치’가 잠깐 나왔을 때, 그 이미지와 상징이 너무나 강렬한 나머지 내 머릿속에 있던 다른 이미지들이 모조리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내게 이 영화는 ‘전체주의’를 반대하는 영화로 다가왔다. 어떤 영화든지 폭력의 상징으로 히틀러를 사용하는 것을 상당히 조심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순간이었다. 아무튼 큐브릭 감독은 1971년에 히틀러가 죽었음에도 사회 어딘가에서 남아있는, 혹은 다시 생겨나고 있는 전체주의를 봤고, 이를 경계하자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게 아무리 잔학무도한 나쁜 새끼라도 전체주의의 방식으로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거세시켜서는 안 된다, 라고 주장한다. 이를 끝까지 강조하기 위하여, 이 주인공이 정말 나쁜놈이란 것을 엄청나게 강조한다. 그러기 위해 꽤 선정적이고 충격적인 장면을 보여준다. 지금 시대에 나왔다면 꽤나 비판을 받았을 대목이고, 심지어 70년대 그 당시에도 많은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작년 박훈정 감독의 <브이아이피>가 떠올른다. 박훈정 감독은 이종석이 연기한 캐릭터 김광일이 지독한 악인임을 보여주기 위하여 선정적인 장면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것을 선택한다. 아마 <시계태엽 오렌지>의 이 방식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큐브릭도 한건데, 외 난 않되? 하며 조금 억울했을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역시 좀 더 세련된 방법으로 묘사했었어야 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
<시계태엽 오렌지>의 이 선정적인 장면들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평가하는데 상당한 영향을 미친 듯 하다. 그니까 이 장면들이 불편했던 사람들은 이 영화를 좋게 평가하지 않았고, 이 장면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안하면서 볼 수 있었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이 영화를 좋게 평가했다. 네이버 영화 백과사전은 이 영화를 옹호하는 입장이었다. 참고로 감수 위원은 김효선 평론가와 김혜리 기자. 이들은 이 영화의 그 장면들에 대하여, 선정적이기는 하나, 이 장면과 동시에 흘러나오는 고품격 클래식 음악이, 그 장면과 거리를 두며 소격효과를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클래식 음악이, 오히려 그 장면들을 포장하는 것처럼 느껴졌다면? 그렇다면 그 사람은 영화를 잘못 본 것입니까? 아니요. 절대 아니요. 영화는 본 사람 각자가 느낀 것이 맞는 것이다. 이 얘기를 하는 것은 이 영화를 좋게 평가한 김효선 평론가와 김혜리 평론가가 틀렸다고 말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냥 이런 영화를 포함한 예술이 한 방향으로 해석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시절 풀었던 언어 영역 문제들은 정말 부질없었던 것이다. 한 작품을 답을 정해 놓고 해석하는 것이 과연 학생들의 교육에 정말 도움이 되는 것일까. 우리나라 교육, 진짜 문제 투성이다.
-
진중권 씨의 글을 봤다. 그의 글은 항상 어려웠다. 온갖 심리학자와 철학자들이 총출동한다. 이번 글도 그 이름들로 인해 혼란스러웠는데, 그 중에서 이 영화에 대해 좋은 정리를 본 것 같아 여기에 기록해둔다. 진중권 평론가는 이렇게 질문한다. ‘범죄를 못 저지르는 것’과 ‘범죄를 안 저지르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물론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 답이다. 루도비코 갱생 프로그램을 통해 알렉스는 범죄를 못 저지르게 된다. 폭력적인 상황, 성욕이 생기는 상황에 처하면 알렉스는 구역질을 하게 된 것이다. 말 그대로 범죄를 ‘못 저지르게’ 된 것. 그 유명한 이 영화의 결말. 또 한번의 치료를 통해, 이제 그런 상황이 되어도 더 이상 구역질을 하지 않게 된 알렉스는 섹스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I was cured all right.” 스스로 치료되었다고 표현한 것. 알렉스는 이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저지를 수 있으니 이제 범죄를 저지를지 말지 스스로 선택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선택의 자유가 없던 생물에서, 선택의 자유를 가지게 된 알렉스. 진중권 평론가는 글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범죄를 저지를 수 없어서 저지르지 못하는 것은 도덕이 아니다.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지만 저지르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도덕이다. 여기서 우리는 역설적 결론에 도달한다.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인간이야말로 진정으로 도덕이다.’” 참 멋진 결론이었다. 그러니까 진짜 나쁜 놈이지만, 나쁜 짓을 할지 말지 선택할 수 있을 때 도덕에 관해 얘기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강제로 나쁜 짓을 못하도록 ‘전체주의’식으로 주입하는 것은 애초에 도덕이 아니라는 것. 좀 멋있는 말인 것 같아서 계속해서 동어반복을 해보았다.
-
딴 얘기를 많이 했지만 이 영화는, 아니 모든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는 비쥬얼 자체도 신선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고평가 받기 충분한 영화.
'일간 김한우 (영화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7월 7일. 설리 : 허드슨강의 기적 (0) | 2018.07.08 |
---|---|
7월 6일. 기묘한 이야기/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역사의 역사/유시민 (0) | 2018.07.06 |
7월 4일. 그리고 삶은 계속 된다 / 지그재그 3부작 (0) | 2018.07.05 |
<마녀> 느리지만 단호한. 박훈정의 자신감에 배팅한다. (0) | 2018.07.03 |
7월 1일. 환상의 빛 (0) | 2018.07.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