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 이야기

"평범하게 좀 걸을래?" <빌리 엘리어트(Billy Elliot)>

빌리 엘리어트 (Billy Elliot, 2000)
2017년 1월 재개봉

감독 : 스티븐 달드리

 

1.

 빌리는 도저히 평범하게 걸을 수가 없다. 그렇지 않아도 춤이 좋아 미칠 지경인데 그렇게 단호하던 아빠가 이제는 그 누구보다 든든한 지원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그치고 있는 아빠도 사실은 기분이 좋다. 아이가 훌륭한 댄서가 될 것이라는 희망, 그래서 나에게 더 나은 삶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믿음에서 오는 기쁨이라기보다는, 내 아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을 하게 해주는 것.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 내가 도와줬을 때 아이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 그런 것들로부터 오는 순수한 기쁨이다.

 그리고 그 기쁨은 왕실발레학교에 입학하는 것, 그리고 재능을 인정받아 <백조의 호수>백조가 되는 것을 통해 결실을 맺고, 과거의 기분 좋은 선택이, 힘들었지만 돌이켜보면 옳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성공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있었던 모든 아픔, 희생들을 보상받는다. 아팠고, 힘들었지만 지금 행복하니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이 영화가 되어 다른 이들의 피를 끓어오르게 한다.

 나는 이 영화의 이 장면을 현실에서도 종종 보기를 원한다. 모든 아이들이 영어, 수학 등 학교 과목의 선행 학습을 위한 학원으로,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신나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런 모습을 종종 보고 싶다. 그 걸음이 결실을 맺을 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래도 지금 저 장면은 너무나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가.

 


 

2.

 빌리는 아마도 친구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발레를 좋아하는 성향이 빌리를 그렇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영화적 배경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실제로, 영화에 나오는 빌리의 친구는 게이인 마이클이 전부다. 물론 영화 전개상 친구가 필요하지 않아 친구를 넣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아무튼 표면상으로 보이는 친구는 하나이고, 마이클도 빌리가 유일한 친구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에 따라 따라오는 의문점 하나. 왜 하필 한 명 있는 친구가 동성애자인가.

 감독은 발레를 좋아하는 것남자를 좋아하는 것을 같은 개념이라고 본 것이 아닌가 싶다. 둘 다 '좋아하는 이유를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는 점'에서, 같다. 음악이 나오면 어쩔 수 없이 몸이 반응하는 것, 남자임에도 남자에게 끌리는 것에는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그냥 그렇게 일어나는 것을 타인으로부터 거부당했던 입장인 둘이, 서로를 이해하고 응원하는 친구가 된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엔딩씬의 빌리의 공연은, 빌리만의 퍼포먼스가 아니다. 빌리뿐만 아니라 마이클 또한, 같은 세월을, 타인의 편견을 이겨내고 버티어, 마침내 그 공연장에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빌리 엘리어트>의 엔딩씬은 빌리와 마이클의 합동 공연이다.

 


 

3.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얼핏 빌리의 꿈에 관한 얘기로만 읽히기 쉽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 제목 자체가 빌리에만 집중하게 만드는 제목이다. 하지만 나는 제목을 <Mr.엘리어트>로 바꾸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엘리어트 성씨를 가진 다른 가족들 또한 영화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본다.

 개천에서 난 빌리가 결국 백조가 되는 것이 당연히 빌리가 가진 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희생이 없었다면 이 신화는 완성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박지성과 김연아도, 그들의 업적을 비하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부모님의 뒷바라지가 없었다면 지금과는 조금 달랐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나는 지성이형과 연아킴을 정말로 존경함을 밝힌다.) 영화에서 파업자들 중에서도 완강한 파업자에 속하던 아버지 재키 엘리어트는, 목 놓아 배신자들이라고 외쳤던 사람들과 섞여 버스에 몸을 싣는다. 그것은 단순히 파업을 포기하고 일터로 돌아가는, 하나의 행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을 포기하는 큰 결단이었다. 예컨대 열렬한 독립운동가가 자신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친일파들에게 무릎을 꿇는 정도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신념을 버림으로써 재키에게 많은 것이 따라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원래의, 끽 해야 중산층 정도 수준이 될까 말까한 정도의 급여를 받을 뿐이었고, 그것도 모자라 죽은 아내의 유품까지 모조리 팔아 넘겨야했다. 간혹 이정도의 능력도 없어 음지에서 장기를 파는 류의 이야기가 나오는 영화도 있긴 한데, 그것에 비하면 양반이긴 하지만 그래도 재키의 희생이 작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리하여 나는 이 영화가 하고자 했던 말을 이렇게 본다.

좋아하는 게 있어? OK. 포기하지 마. Always Be yourself. 하지만 그에 따른 희생이 있다는 것도, 꼭 알아둬.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하나만 꼽기 힘들 정도로 좋은 장면들이 많았다. 17년 전에 개봉한, 너무나도 신파 같은 영화지만 전혀 그런 생각 없이 푹 빠져서 보았다. 좋은 영화는 시대를 타지 않는다는 말이 딱 맞는 영화. ★★★★